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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멘 공화국(Republic of Yemen) - 국가 정보, 지도, 위치 - 이번 예멘 테러 발생국가...

by 3sun 2009.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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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멘 위치 (지도 = 구글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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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멘 공화국 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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멘 공화국(아랍어: الجمهورية اليمنية 알-줌후리야 알-야마니야, Republic of Yemen)은 중동아라비아 반도 남서부에 위치한 국가이다. 가장 오래된 인류 거주지 중 하나로 유구한 역사를 지녔으며, 아라비안 나이트의 주요 배경지 중 하나이다. 아시아아프리카, 유럽의 길목에 위치하여 예로부터 문화적으로 풍부했고, 중동국가 가운데서 아랍인의 독특한 기질과 문화적 전통을 가장 잘 이어가고 있는 나라로 손꼽힌다.

 역사

초기

예멘은 매우 오래된 인류 거주지 중 하나로, 예멘 역사의 기원은 사바 왕국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이는 B.C. 950에서 B.C. 115년까지 지속되었다. 그 이후 AD 6세기까지 예멘은 힘야르 왕조에 의해 통치되었다. AD 525년 에티오피아는 힘야르 왕국을 정복하였으나, AD 575년에는 차례로 페르시아의 침략에 의해 정복되었다. 7세기에 예멘은 명목상으로 이슬람을 받아들였으며, 9세기에는 자이드 파 이맘, 야흐야 알 하디 일라 하끄는 라시드 왕조를 세웠으며 , 이 왕조는 근대에 이르기까지 단절을 계속하면서 존속하였다.

투르크 치하

1517년, 예멘은 오스만 제국에 의해서 정복되었다. 오스만의 점령은 1918년 무드로스 휴전 때까지 지속되었으나, 1911년 이맘 야흐야는 오스만의 종주권을 인정하지만 고지대의 이맘과 티아라의 오스만 간 행정 통제를 분할하는 조약을 보장하기 위하여 대규모 봉기를 주도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기간동안 이맘은 오스만을 지원하였고, 1799년 페림 섬을 점령하여 1839년 아덴에 보호령을 수립한 영국은 아시르의 작은 주로부터 예멘의 북쪽지역까지 침공한 이드리스의 침략자들을 지원하였다.

해방 전후

1960년대

1962년 9월, 예멘에서 쿠데타가 발생하였다. 이 쿠데타는 후에 대통령이 된 압둘라 앗 살레 대령을 포함한 예멘 군장교에 의해 주도되었으며, UAR[1] 의 군대에 의해 지원되었으며 공화국 군대는 대부분의 국가에 대한 통제력을 획득하였다.

새롭게 선포된 예멘 아랍 공화국(Yemen Arab Republic, YAR)은 곧이어 소련미국에 의하여 승인되었으며, 1963년초 UN 가입이 허락되었다. 그러나 영국은 왕정을 계속 인정하였으며, UAR이 철수할 때까지 YAR을 승인하지 않겠다고 계속 천명하였다.

1990년 예멘이 통일될 때까지 YAR은 보수적인 일련의 군사정권에 의해서 통치되었다. 하지만 정치적 안정은 교묘히 이루어졌다. 1962년이후 4명의 대통령이 쿠데타나 혹은 암살에 의하여 전복되었다. 두 전임자의 사망 이후 8개월 이내에 육군 중령 알리 압둘라 살레는 1978년 7월 대통령이 되었다. 1978년 9월 암살 시도와 동년 10월 선임 육군 장교들에 의한 쿠테타 시도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살레 대통령은 형식적인 후퇴를 생각하였다. 이들 두 사건에 있어서 남예멘(PDRY)의 개입 의혹은 두 예멘간의 관계에 긴장을 야기시켰다. 1979년 2월과 3월 광범위한 국경 충돌은 공개적인 전쟁으로 확대되었다.

이러한 과정에 보호국과 예멘의 이웃 국가들과의 관계는 항상 미묘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잦은 충돌은 1914년 3월 오스만 정부와 서명한 국경의 경계 설정을 유도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기간동안 예멘의 오스만 군대는 보호령의 커다란 영토를 점령하였다. 이러한 과정에 1919년 대부분의 부족장들은 영국과의 조약을 갱신하였지만, 예멘의 원칙적인 종교적 권한을 행사하는 사나(San'a) 의 이맘은 모든 영토에 대한 주장을 유지하였다. 1962년 8월 예멘은 런던회의에서 합의된 협정을 선포하였고, 아덴 영토에 대한 주장을 반복하였다. 드디어 1962년 9월 27일 혁명 이후 YAR이 수립되었으며, 혁명 지도자 살레 대령은 그 당시 새로운 정권이 아덴 영토에 대한 주권을 강요할 의도가 없음을 천명하였고, 그 대신 영국과의 친선을 희망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남북 예멘은 운명을 달리하는 두 국가로 갈라지는 비운을 맞게 되었다. 하지만 아덴에서는 연방정부로 편입되는데 대해 상당한 반대가 있었다. 1962년 8월 발생한 사건은 합법적인 국가로서 연방정부로의 결합을 천거하는 백서를 발간케 되었다. 이에 대해 몇몇 정당들은 이러한 움직임에 대해 반대하였고, 1962년 발생한 사건에 대하여 동맹파업과 데모로 직접적인 반대를 하였다. 동년 9월 초안된 조약이 아덴 입법회의의 통과됨과 동시에 심각한 폭동이 발생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과 연방정부는 1963년 1월 협정에 서명하여 연방정부의 일원이 되었다. 1967년 6월 20일 영국 정부는 예멘의 의도를 알게 되었고, 동년 8월 25일 예멘으로 부터 영국군의 철수는 일찍이 시작되었다.

아덴이 독립 의사를 표명했을 때, 영국 정부는 군대 철수를 서두를 것과 가능하다면 1968년 1월 9일 남 아라비아를 독립시킬 것을 결의하였다. 1967년 11월 27일 영국 군대가 남 아라비아의 군대에게 아덴 지역을 양도한 이후, '민족자유전선'(National Liberation Front; NLF)은 '남예멘 인민공화국'(People's Republic of Southern Yemen)의 창설을 선포하였다. 새로운 정권은 전임자들보다 좌익적이고 친소적 입장을 취하였다.

[편집] 통합 직전

드디어 1970년 11월 새로운 헌법은 예멘 통일의 가능성을 시사하면서 '예멘 인민민주주의공화국'(People's Democratic Republic of Yemen; PDRY)으로 국가 명칭의 개정을 공포하였다. 영국군의 철수 이후 아덴에서 새롭게 형성된 정부의 출현은 사실상 예멘을 체제가 다른 두 국가로 분열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한편 남북예멘의 통합에 관한 논의는 1972년 9월 양국간 국경분쟁 이후 리비아를 비롯한 아랍 국가들의 적극적인 중재로 동년 10월 28일 카이로정 상회담을 개최하면서 시작되었다. 1979년 2월 남북예멘간 제2차 국경분쟁 이후 아랍연맹평의회의 중재안에 따라 동년 3월 쿠웨이트정상회담이 이루어지면서 통합과정은 제2기를 맞게 된다. 1986년 7월 남예멘의 알 아타스 대통령과 북예멘의 살레 대통령은 리비아의 카다피 대통령의 초청으로 트리폴리에 서 통합 및 북예멘에 거주하는 남예멘 피난민 송환문제를 논의하기 위하여 회담을 갖는 등 광범위한 통일논의를 계속하였다. 1988년 5월 사나에서 개최된 회담에서 북예멘의 살레 대통령과 남예멘 사회당(YSP) 중앙위원회 사무총장 알 바이드는 양국의 통일에 관한 회담을 지속적으로 열 것에 대하여 합의하였다.

통합

1990년 5월 남북예멘의 무장이 통일에 앞서 기술적으로 해제되었고, 1990년 5월 22일 '예멘공화국'(The Republic of Yemen)이 전격적으로 선포되었다. 북예멘의 지도자 살레 대통령은 대통령의 직책을 맡았고, 부통령은 남예멘의 지도자 바이드가 맡게 되었다. 또한 북예멘의 수도 사나는 모든 각료와 정부위원회를 불러들여 새 정부의 '행정수도'로 명명되었다.

지리적으로는 훨씬 크지만 상대적으로 인구가 적은 남예멘의 수도 아덴은 보상을 위하여 '자유무역지대'의 약속과 함께 '경제수도'로 명명되었다. 1993년 4월 선거에서 바이드가 패배한 이후, 살레와 바이드 관계는 악화되었고 바이드는 동년 9월 사나를 떠나 아덴으로 되돌아갔다. 오만요르단의 중재 노력을 포함한 수많은 화해 시도에도 불구하고 양 지도자는 합의를 이루지 못했다. 해결의 열쇠인 제도 통합에 대한 실패는 남북예멘간의 긴장을 고조시켰으며, 1994연초 산발적인 무력 충돌을 가져왔다.

[편집] 내란과 그 처리

결국 남예멘이 통일된 공화국에서 탈퇴를 선언함으로써 1994년 5월 5일 전면적인 내전이 발발하였다. 남측 공군력의 우세에도 불구하고 남측 군대는 아덴으로 후퇴하였고 드디어 동년 7월 7일 항복하였다. 북예멘은 남예멘 분리주의자들에 대해 '군의 통일'을 위한 승리를 선언하였고, 남예멘 지도자들은 인접 국가로 피신하였다. 그후 바이드는 오만에서 정치로부터 은퇴를 하였고 북예멘의 '재통일' 형식으로 예멘은 통일을 이룩하였다.

내전 후 대통령 살레는 1999년 최초의 국민투표로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96.3%의 득표율로 재선되었고, 2001년 2월 헌법을 개정하여 대통령 임기를 5년에서 7년으로, 국회의원 임기를 4년에서 6년으로 연장하는 등 집권기반을 강화하였다.

분쟁

예멘공화국은 통일 후 외교 노선을 중립주의, 비동맹주의, 이슬람 세계와의 연대강화를 기본으로 온건한 노선을 추구하였다. 1990∼1991년의 걸프 전쟁에서 이라크의 입장을 지지하고 미군을 위시한 다국적군의 대(對) 이라크 응징을 반대하고 나섰다. 이에 미국의 원조가 급감하였으며, 사우디 아라비아 정부는 예멘인에 대한 사증 면제, 경제활동 자유 등 우대 조치를 중지하고 예멘인들의 취업입국을 규제하고 외교관 50명을 출국시켰으며, 약 80만 명의 예멘인 노동자들을 축출하였다. 이러한 불이익에도 불구하고 예멘은 사우디 아라비아와 오만과의 국경 확정 문제로 계속 대립하고 있다.

외교적 노력

예멘은 미국과의 관계 회복에 노력하고 걸프 전쟁 중 취한 아랍세계와의 불편한 관계를 해소하기 위해 1993년 6·7월 사우디 아라비아, 바레인 등을 방문하였고, 1994년 대통령 살레가 사우디 아라비아를 방문하였다. 2000년 6월에는 사우디 아라비아와 국경협정을 체결하여 분쟁 종식 계기를 마련하였다. 2000년 10월 12일에는 아덴항에서 미국 군함이 테러로 피격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2001년 9월 11일 국제테러단체인 알카에다에 의한 것으로 추정되는 9·11 테러[2]가 일어나자 미국은 예멘에 알카에다 조직 가담 혐의자 등 테러범들이 있을 것으로 보고, 예멘 정부에 테러범을 색출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예멘 정부의 대테러 투쟁은 계속되고 있으며, 2001년 12월 알카에다 조직 가담 혐의자를 추적하던 중 부족군과의 교전으로 30여 명이 사망하였다.

지리

북동부 사막 와디(Wadi)지형과 고대도시 쉬밤(Shibam)
중부 고원지대 계단식 경작지와 산악마을

중동아라비아 반도 남서부에 위치하며 국토의 면적은 52만 7,986㎢로 프랑스와 비슷한 크기이다. 북쪽으로는 사우디 아라비아, 동쪽으로는 오만과 국경을 맞대고 있으며, 서쪽으로 홍해, 남쪽으로 아라비아 해를 접하고 있다.

예멘은 지리적으로 북서부의 산지, 북동부의 룹알할리사막[3], 중부의 고원지대, 남부 해안 평야의 네 지역으로 나뉘어진다.

북서부산지와 북동부의 룹알할리사막은 전형적인 사막이다. 그 중 북동부 내륙의 하드라마우트[4]는 하천의 침식작용에 의해서 깊이 팬 석회암 언덕이 특이한 풍경을 이루고 있으며, 건계(乾季)에는 물이 마르는 대규모 와디(Wadi : 간헐하천)[5] 지형이 발달하였다. 남북 방향으로 뻗어 있는 중부의 고원지대는 해발고도 1,300∼3,000m로, 아라비아 반도의 최고봉인 해발 3,760m의 나비수아이브산(山)과 구약성서의 대홍수 뒤 노아가 세웠다고 전하는 고도(古都) 사누아가 이 곳에 있다. 이 지역은 토양이 비옥하고 규칙적인 강우를 동반하는 인도양 계절풍[6]의 영향으로 비교적 풍부하고도 다양한 작물을 계단식으로 경작한다. 남부 해안 평야는 홍해 연안부터 바브엘만데브 해협[7]을 거쳐 오만 국경까지 좁고 길게 펼쳐져 있으며, 중부고원지대에 비해 약 2%만이 경작 가능지이다.

기후

남부 해안 어느 어촌

기후에 따라 서부 홍해 연안의 평야지대인 티하마(Tihama), 수도 사나를 포함한 중부 고원지대, 북부와 동부의 사막지대의 세 지역으로 나뉜다.

  • 티하마 지역은 연중 무더운 편이다. 12월과 1월에는 낮기온이 25℃ 정도로 온화하지만, 6월에는 최고 40℃까지 올라간다. 습도 역시 높지만 연평균 강우량은 960mm 정도로 많지 않다.
  • 중부 고원지대는 온대에 속하며 아라비아 반도에서 가장 쾌적한 기후지대이다. 연평균 기온은 22~25℃로 온화하며, 사나를 비롯한 해발 2000mm 이상의 더 높은 지역은 15℃ 내외로 한결 서늘하다. 7월에는 낮기온이 최고 30℃로 다소 덥지만 12월과 1월에는 밤기온이 5℃까지 내려가는 등 쌀쌀하다. 연평균 강수량은 500mm 정도이며, 고도가 높아질수록 강수량도 증가한다. 이 곳은 기온도 생활하기에 적당하며, 강수량도 비교적 많아 아라비아 반도에서 일찍부터 개발된 곳으로 행복한 아라비아라고 불렸던 곳이다
  • 사막지대는 고온 건조하여 12월에는 25℃, 6월에는 37℃까지 올라간다. 비는 5월에서 9월 사이에 조금 내린다.

주민

해맑은 미소의 어린 아이

민족 구성아랍인이 대다수이며 아프로아랍, 남부아시아인, 유럽인 등이 극소수이다. 오늘날 아랍인의 원형이 예멘 지역에서 형성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져 있어 주목을 끈다. 티하마 평야와 남부에는 5∼6세기 무렵에 들어왔다는 동아프리카계의 흑인과 혼혈이 많다. 과거로부터 살아온 유대인들은 대부분 이스라엘로 이주하여 오늘날 거의 볼 수 없다. 예멘의 주민은 주로 고원지대를 중심으로 혼혈을 거듭하면서 살아왔다. 같은 민족 내에서도 종교나 부족 관계, 또는 주거의 형태 등에서 구분되는 특징이 있다.

인구는 약 2,200만명으로 아라비아 반도 국가들 중 가장 많은 편이며, 연평균 인구 증가율은 3.5%로 세계에서 가장 높은 편에 속한다.

인구 구성은 0~14세 46.3%, 15~64세 51.1%, 65 세 이상 2.6% 로서 전형적인 다산다사형이고, 약 27%만이 도시에 살고 있다. 문맹률은 49.8%로 대단히 높다.

언어

아랍어공용어이다.
공공기관이나 상업적 거래에서는 영어가 통용되지만 여타 아랍 국가들에 비해 영어의 사용이 광범위하지 못하다. 과거 남예멘의 수도였던 아덴에서는 러시아어도 사용한다.


[편집] 종교

수도 사나에 있는 어느 모스크

이슬람교가 예멘의 국교로, 전체 인구의 99.9%가 무슬림이다.
대부분은 수니파이며, 소수의 시아파는 주로 북부 국경 지역에 거주한다. 그 외 기독교(에티오피아 정교회[8], 로마 가톨릭 교회, 개신교), 유대교, 힌두교가 극소수 있다. 이중 기독교도는 대부분 에티오피아 난민이나 비정부 단체에서 일하는 외국인이며, 예멘인은 소수이다.

경제

예멘의 1인당 GDP는 1,000달러(2006년 추산) 정도로 아랍권 세계의 최빈국 가운데 하나이다. 더구나 통일 이후 정치적으로 커다란 후유증을 겪으면서 실업, 인플레이션 등이 가중되어 현재의 경제여건은 매우 좋지 않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예멘 경제에서 석유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현재 석유가 예멘 정부 수익의 약 70%를 차지하고, 바꿔 말하면 통일 정부의 경제개발의 사활이 석유부문에 달려 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렇듯 중요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예멘의 석유는 여타 다른 중동 아랍국들에 비해서 개발이 매우 늦었다는 점이 하나의 특징이 되고 있다. 예멘의 경제 가운데 최우선 순위를 차지하는 것은 과거 두 국가의 국경 지대에 매장되어 있는 석유탐사를 확대하는 것이다. 통일 이후 남예멘지역에서 최근 상당한 원유의 매장량이 확인되어 예멘인들은 그들 경제의 원동력이 될 수 있다는 기대 하에 석유산업에 많은 투자유치계획을 수립하고 있다.

자유무역지역 아덴 항구

농업은 여전히 주산업이지만 대체적으로 자연 조건의 악화, 인력·영농기술의 부족 등으로 생산량이 적어 자급할 정도에 미치지 못한다. 수산업은 해안의 풍부한 어족 자원에 비해 선박의 노후, 시설의 미비 등으로 영세한 실정이다. 공업 중에는 섬유산업이 비교적 발달하여 바질과 사나에 대규모 방직공장이 있다. 공업의 중심지로 발전해 온 아덴항은 외국인 투자 유치를 위하여 1991년 5월 30일 자유무역지역으로 선정되었다.

한편으로, 기록되지 않은 예멘 경제가 공식적인 경제만큼이나 큰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비공식적인 조사에 따르면, 국가의 예상되는 빈곤과는 대조적으로 대규모 소비재 수입을 하고 있는 예멘인들의 경제활동은 공식적인 데이터에서 제시된 것 보다 상당히 높은 수준이다. 이와 같은 규모의 이중경제 구조의 존재는 네 가지 요인으로부터 파생된다고 볼 수 있다.

  • 첫째, 중앙은행이 공식적인 환율과 암시장에서 제시된 환율간의 가격차를 유지하는데 실패하였다.
  • 둘째, 남북예멘 및 통일정부 모두는 국제수지 적자를 해소하기 위해 허가와 보복관세의 형태로 수입통제를 실시하였다. 이러한 비용 조치들은, 예멘인들을 비공식적인 경제와 국가의 광범위하고 정교한 밀수조직 형태의 장점을 이용하도록 유인하면서, 공식적인 채널을 통하여 얻어진 수입품에 인접한 토지 경계선의 가격을 인상시키고 있다. 예멘은 사우디 아라비아와의 빈틈이 많은 국경선을 이용하는 강력한 부족들에 의해 조직된 밀수조직의 집산지이며 종착지이다. 홍해로 상륙하는 알콜의 선적은 술이 금지된 사우디 아라비아로 교역되고, 승용차와 트럭은 사우디로부터 되돌아와 예멘에서 판매되고 허가가 얻어진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증가된 소비재의 홍수는 아라비아 반도와 동아프리카 해안을 통하여 확대된 지하 교역형태로 흡수된다.
  • 셋째, 까트(Qat)에 의한 영향이다. 카트는 세계적으로 마약성 식물로 분류되어 교역이 금지된, 예멘인들만이 즐기는 독특한 기호품인데, 대다수 예멘인들은 이른 오후부터 저녁때까지 까트를 씹는다. 1992년 예멘타임즈에 따르면, 까트에 의한 부가가치는 다른 농작물의 경작으로부터 생산되는 가치의 거의 두배가 되는 기록된 GDP의 25%에 상응하는 것으로 추계되고 있다. 까트의 생산과 판매에는 노동 인구의 거의 20%에 해당하는 50만명의 노동력이 고용되어 있는 것으로 이 자료는 또한 밝히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상당수의 농부들이 농작물 생산을 기피하는 경향을 인정하면서도 까트가 시장에서 판매될 경우 정부에서 세금을 부과하는 현상과 까트에 대한 정부의 공식적인 데이터가 발표되지 않는 점은 매우 아이러니컬하다.
  • 넷째, 해외 이주자들에 의한 경제활동이다. 예멘인은 사우디 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 등지에 대규모 이주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으며, 이들의 규모와 특성에 따른 불확실성이 그들 경제에 뿌리 깊게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이다. 단기 이주자들로부터의 송금 유입과 장기 해외 거주자들의 자본형태의 실제 규모는 현금이나 송금의 형태보다는 가족의 네트워크를 통한 재화 송금의 형태를 취하기 때문에 추계하기가 매우 어렵다.

현재 예멘 경제는 외국의 원조에 크게 의존하고 있는 상태로, 2006년 11월 예멘은 아라비아 반도 국가들과 서방세계로부터 47억 달러를 지원받은 바 있다. 또한 IMF로부터 1967년 이후 4차례에 걸쳐 지원받았으나 예멘 정부의 개혁 의지가 둔화되고 실행이 지연되어 자금 지원이 연기되었다. 2002년 10월 세계은행은 예멘이 테러와의 전쟁 최전선에서 노력하고 있는 상황을 감안하여 경제적 불안정 상태를 해소하기 위한 목적으로 4년 간 총 23억 달러 상당의 경제지원을 하기로 결정하였다.

하지만 현재 비록 교육수준은 낮지만 인구 잠재력이 크고 석유 등의 광물자원이 풍부한 점을 감안하면, 앞으로 인프라가 갖춰지고 체계적인 교육이 이루어짐에 따라 예멘 경제의 성장 가능성은 크다고 볼 수 있다.

문화

아시아아프리카, 유럽의 길목에 위치한 예멘은 예로부터 다양한 문화가 발전하여 문화적으로 매우 풍부한 나라이다. 또한 중동국가 가운데서 아랍인의 독특한 기질과 문화적 전통을 가장 잘 이어가는 나라로, 예멘인과 예멘문화에 대한 이해가 없이는 진정한 아라비아 반도의 문화를 이해할 수 없다.

간단한 식사. 손으로 빵을 찢어 계란요리를 쌈처럼 싸서 먹는다.

[편집] 음식

예멘의 음식은 단순하지만 훌륭하다. 아침은 주로 꿀을 곁들인 빵과 샤이(shai) 차로 구성된다. 점심은 하루 중 가장 성대한 식사이다. 양고기, 쇠고기, 닭고기 등의 육류를 즐겨 먹으며, 화덕에서 구운 빈대떡 모양의 편편한 빵이 거의 항상 함께 나온다. 양고기수프(shurba wasabi)와 토마토 등을 잘게 썬 샐러드도 종종 함께 나온다. 고원지대에서는 주로 육류, 콩, 호로파(fenugreek) 등의 향신료를 넣고 스튜처럼 뜨겁게 조리한 salta를 먹는다. 저녁에는 육류보다는 콩, 토마토, 양파 등을 으깨 끓인 비지찌개 비슷한 fool을 빵에 찍어 먹는 등 비교적 가볍게 먹는다. 이 외에 향신료가 섞인 보슬보슬한 쌀밥, 스크램블과 비슷한 계란 요리, 화덕에 구운 생선 등도 많이 먹는다. 예멘인들은 모든 음식을 손으로 먹으며, 따라서 음식점 구석에는 항상 손 씻는 세면대가 마련되어 있다.

[편집] 기호품

예멘은 오랜 옛날부터 향료의 나라로 유명하여 '행운의 아라비아'로 불렸다. 예멘은 오늘날에도 변함없이 다양한 기호품의 땅이다.

[편집] 까트

북서부 산지의 까트 재배지. 까트는 예멘 전체 경작지의 절반 가량을 차지한다.
사나의 까트 시장에서 까트를 사고 파는 모습
오후 까트타임에 까트를 씹으며 시샤를 즐기고 있는 예멘인. 이파리를 가득 넣어 볼이 볼록하다.
이 부분의 본문은 까트입니다.

까트(Qat)는 세계에서 예멘 사람들만이 즐기는 독특한 기호품이다. 까트는 나무가지에 붙은 부드럽고 연한 잎으로 씹음을 통해 그 맛을 느낄 수 있다. 까트로 인해 생기는 까트 문화는 예멘인 생활의 중심이다. 오후 기도가 끝나면 예멘 사람들은 정해진 장소에 모여 까트를 씹으며 대화를 즐긴다. 한쪽 빰에 이파리를 하나 가득 집어넣어 공처럼 둥글게 만들고는 씹어 그 즙을 음미한다. 이때 초심자들은 이파리를 삼킬 수도 있다. 정신적인 집중력이 떨어지는 오후 까트는 사람들로 하여금 정신적으로 힘을 불어 넣어 준다. 까트 타임이 끝나는 때 사람들은 이파리를 뱉어 내고는 찬물로 입을 가셔 내고 일몰 기도를 맞이한다.

까트는 예멘 사람들의 삶을 이해하는데 빼놓을 수 없는 요소이다. 그러나 까트에 들어 있는 환각성분 때문에 까트의 허용 여부를 놓고 논의가 분분하다. 16세기 이슬람 학자인 이븐 하두샤르 알-하이스아미도, 코란에서 까트를 금하고 있지 않지만 거리를 가질 것을 권하고 있다. 1982년에 나온 <예멘의 까트와 그것이 생활에 끼친 영향>이라는 책에서 까트는 부정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1990년 예멘이 통일되기 전까지 북예멘은 까트를 허용했으나, 남예멘은 까트를 금지하고 있었다. 통일이 북예멘 주도로 이루어진 지금 까트가 허용되고 있으며, 문화적인 측면이 아닌 과학적인 측면에서의 연구가 계속되고 있다. WHO의 연구에 의하면 까트에는 카틴과 카티논 성분이 있어 자극제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카틴과 카티논이 아드레날린의 분비를 촉진하고, 그 결과 체온과 혈압, 맥박수가 높아지며 감정이나 정서적으로 흥분을 하게 된다. 그리고 시차를 두고 나타나는 효과로는 식욕감퇴, 졸음, 신경과민, 무력감 등이 있다. 더욱이 이러한 반응은 까트의 종류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데, 값이 비싸고 질이 좋은 까트에서 마취나 무력감 같은 반응이 적게 나타나는 것으로 알려졌다.

예멘 사람들은 까트를 과학이나 의학의 입장에서 부정적으로 보는 것에 반대한다. 까트를 씹으며 대화하는 것은 하나의 관습으로, 공동체 내의 모든 사람들을 이해하게 하고 결속시켜 준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술이 금지된 예멘에서, 다른 국가의 술이 그렇듯 까트는 사교와 친목의 매개체인 것이다. 그러나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까트가 농업부문의 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지나치게 높고, 많은 사람들이 월수입의 30% 정도를 까트를 구입하는데 쓰고 있어 비판의 목소리가 많다.

까트가 가장 애호되는 지역이 예멘인데, 그렇다면 그 까트의 고향은 어디일까? 커피의 고향이 예멘인 것과는 달리 까트의 고향은 에티오피아로 알려지고 있다. 약 700년전에 처음 도입되었으며, 일종의 약용식물로 사용되었다. 종교적인 측면에서 신성을 보여주기 위해 사용되기도 했고, 부유층의 사람들이 권태를 달래기 위해 사용되기도 했다. 그러다가 최근 30여년 동안 까트의 재배면적이 급속도로 증가하였고 까트 문화가 일반화되었다. 까트 재배가 이렇게 증가한 이유는 까트로부터 얻는 소득이 일반 농산품을 통해 얻는 소득의 5배가 넘기 때문이다. 까트는 이제 커피를 대신해서 예멘을 상징하는 기호품이다.

시샤

시샤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시샤(Shisha)는 아랍어로 물담배를 뜻하며, 아라비아 반도가 본고장으로 오늘날에도 아라비아 반도 전역에 걸쳐 사랑받고 있다. 상단의 작은 단지(pot)에 향료를 넣고 그 위에 숯을 얹어 긴 호스를 통해 숨을 빨아들이면, 향이 밴 연기가 하단의 물을 통과해 호스를 거쳐 들어온다. 사과향, 복숭아향, 쟈스민향, 민트향 등 다양한 향료를 취향에 따라 즐길 수 있다.

사진 왼쪽이 우유를 넣은 샤이(shai). 예멘인들은 식사할 때도 샤이를 종종 곁들여 마신다.

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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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이(Shai)는 예멘인들이 가장 즐겨마시는 차 종류이다. 홍차와 비슷하지만 좀 더 달콤하며, 우유를 넣거나 민트 잎을 띄워 마시기도 한다. 예멘 전역의 어느 찻집, 음식점에서나 쉽게 찾아볼 수 있으며 식사와 함께 곁들여 마시는 경우도 많다.

커피

커피(coffee)는 15세기 말경 예멘 홍해 연안의 조그만 항구도시 모카(Al-Mocha)[9]로부터 유럽에 처음 소개되었다. 당시 모카는 양질의 커피 수출항이었으며, 오늘날의 모카 커피[10]라 는 이름은 여기서 유래되었다. 전설에 의하면 모카의 수호성인인 알리 이븐 오마 알-샤딜리가 포루투갈의 선원들에게 자신이 마시던 검은 음료를 제공했는데, 그 음료가 정신을 맑게 하고 기분을 전환시키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선원들은 커피의 씨앗을 얻고 또 커피의 제조법을 익혀 포르투갈로 돌아왔다. 커피는 짧은 시간 내에 전 유럽으로 퍼져 나갔으며, 현재 가장 보편적인 음료로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고 있다.

오늘날에는 많지 않은 양의 커피가 예멘의 서부 산악지대에서 재배되는데, 주로 사우디, 유럽, 일본 그리고 미국, 러시아로 수출되며, 초코렛이나 빙과류의 맛을 내는데 쓰인다. 그 중 바니 마타르 지역에서 생산되는 마타리(Matari)와 알 하이마 지역에서 생산되는 하이미(Haimi)는 대표적인 아랍산 커피(coffee arabica)로 명성이 높다. 그러나 예멘의 재래식 생산 방식이 아프리카남미에서 시행되고 있는 대단위 영농에 의한 생산을 능가하기란 어렵다. 예멘이 내세울 수 있는 것은 특유의 향과 품질의 우수성 뿐이다.

오늘날 예멘인들은 커피보다는 샤이를 즐겨 마신다.

그 외 기호품

  • 그 외 유향, 헤나 등의 수많은 향료들이 생산되고 다양한 목적으로 소비된다.
  • 담배의 소비도 많아, 성인 남성의 흡연자 비율은 상당히 높은 편이다.
  • 은 국가 차원에서 금지되어 있어 찾아보기 어렵다.

의복

예멘 남녀의 전형적인 복장

지역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오른쪽 사진이 예멘 남녀의 가장 전형적인 복장이다. 남자는 원피스형 옷에 양복 상의를 걸치고, 머리나 어깨에 두건을 두르고 허리에는 잠비아를 찬다. 여자는 대부분 검은색 드레스형 옷에 검은색 히잡을 입어 눈과 손만 볼 수 있지만, 집에서 가족과만 있을 때는 검은 옷 안에 입은 개성있는 복장으로 생활한다. 손에 헤나 문신을 하고 금목걸이, 금팔찌를 하는 등 장신구를 즐긴다.

잠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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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비아(jambia)는 남자들이 장식의 목적으로 착용하는 아랍식 칼로서 전통 의상의 일부이다. 현대 산업사회 속에서도 예멘인들이 자존심으로 지켜 오고 있는 것이 이 예멘 특유의 '잠비아'이다. 잠비아는 조상 대대로 내려온 예멘의 전통으로서 과거에는 가문이나 부의 상징으로 애장품이 되었다. 이러한 잠비아의 전통은 오늘날 오만과 예멘에서 유일하게 목격할 수 있는 아랍의 전통이다. 잠비아의 진가는 그것을 만든 재료, 특히 손잡이에 의해서 신분이나 부의 정도를 달리한다. 따라서 나무로 만든 손잡이에서부터 짐승의 뿔이나 금, 은 보화로 만들어진 다양한 종류의 잠비아가 있으며, 코뿔소의 뿔로 만든 손잡이는 으뜸으로 꼽히고 있다.

예멘인들이 칼을 차고 다니기에 언뜻 보면 두려움을 느낄 수 있지만 예멘인들의 전통은 칼에 손을 대는 것을 금기시하기 때문에 잠비아로 인한 사고는 거의 없는 편이다. 예멘인들은 함부로 칼을 뽑지 않는다. 사소한 언쟁에서 치고 받는 싸움이 있을지라도 잠비아에 손을 대는 것은 최대한 절제한다. 만일 잠비아에 손을 댈 경우 이는 살인 의도로 간주된다. 따라서 잠비아는 예멘인들이 지키는 하나의 '전통'이지 결코 '무기'가 아니다. 더 나아가 잠비아를 통해 절제된 삶을 엿 볼 수 있는 또다른 기회이기도 하다. 다시 말하면 사소한 흥분이나 싸움에 손에 쥔 무기를 아무때나 휘두르지 않는다는 일종의 '절제된 삶'을 보여주는 하나의 단면이기도 하다.

예멘이 과거 남 북으로 분열되어 있던 시절에는 사회주의 국가였던 남예멘은 법적으로 잠비아를 금지시키고 있었으나, 부족제도의 성향이 짙은 북예멘에서는 계속 허용하였다. 통일이후 잠비아는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고 있으나, 산업사회의 발전에 따라 잠비아를 벗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북예멘의 수도 사나에서는 아랍 전통 의상 '잘라비아'에 잠비아를 찬 많은 사람들을 목격할 수 있다. 1988년 한국의 올림픽 입장식 때도 선수단의 잠비아 착용문제로 어려움이 있었다. 결국 칼은 빼고 칼집만 차고 입장하는 수준에서 참가가 허락된 적이 있다. 한국인들이 지금은 잃어버린 상투를 생각할 때 연민의 정이 가는 것이 잠비아이기도 하다.

히잡

히잡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히잡(hijab)은 이슬람 경전 꾸르안에 도 언급되어 있는 역사 깊은 이슬람 전통 복식으로, 여성들이 외출할 때 얼굴이나 머리카락, 가슴을 가리기 위해 머리에 쓰는 가리개를 말한다. 이슬람 여성들 가운데 특히 아랍권의 여성들이 착용하며, 지역이나 종교적 성향, 계층, 연령 등에 따라 그 형태가 다양하다. 예멘에서는 대부분 눈만 노출하는 형태를 착용한다.

현대에 와서 페미니스트들이 히잡이 여성을 억압하는 수단이라며 비판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이슬람권에서 히잡을 유지하고 있다. 히잡은 이슬람의 교리에 바탕한 전통이자 문화로, 그들 나름의 논리가 있고 대부분의 여성들 또한 그를 지지하기 때문에 문화상대주의[11]적 접근이 필요하다.

예멘의 전형적인 거주 형태

거주

자연에서 얻을 수 있는 재료로 된 집과 형태를 보면 거주문화가 항상 자연 경관과 어울리게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지역에 따라 진흙, 벽돌, 돌을 적절히 이용하며 높은 지역에서는 4~6층 높이의 집을 짓는다. 지하층에서는 가축을 기르거나 저장을 위한 공간으로 활용하고, 1층에는 가구, 2층에는 손님들을 위한 방, 주방과 거실은 3,4층에 둔다. 가장 높은 곳에 마프레이라고 불리는 전망 좋고 큰 방이 있는데 이곳은 주인이 낮에 친구들을 접대하고 만나는 곳으로 이용한다. 남자들은 매일 오후에 이 곳에 모여 해질 때까지 카트 타임을 즐긴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사나 구시가지

문화유산

예멘에는 예로부터 독특한 문화유산이 풍부하다. 3개의 문화유산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대한관계

예멘은 남북분단 시절 아랍문화 성향이 강했던 북예멘은 대한민국과 수교하였고 사회주의 성향이 강했던 남예멘은 1990년 통일 직전에 대한민국과 수교하였으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남예멘과 수교하였고, 통일 이후에는 남북 동시수교국이 되었다. 한국은 예멘 현지에 공관을 두었으나 한때 철수하여 주사우디 대사관이 겸임하였다가 2008년 현지 공관을 재개설하였다.

예멘 폭발물 사상 사고

2009년 3월 15일 예멘 시밤 지역에서 폭발 사고가 발생하여 한국인 4명이 숨졌다.[15] 정부는 예멘의 조사 결과를 인용하여 테러일 가능성이 높다고 전했다.[16] 3월 17일 일행 18명 중 사망자 4명과 여행사 관계자 2명을 제외한 생존자 12명이 인천공항을 통해 귀국하였다.[17]


출처 = http://ko.wikipedia.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