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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가(愛國歌)는 대한민국의 국가(國歌)의 공식 이름이다.
작사
애국가의 가사는 1900년대에 쓰여졌으며, 작사자는 공식적으로 미상이다.
작사자에 대한 설은 크게 윤치호라는 설과 안창호라는 설 두 가지가 있다. 작사자 윤치호 설은 윤치호가 애국가의 가사를 1907년에 써서 후에 그 자신의 이름으로 출판했다는 것이다. 한편 안창호가 썼다는 주장은 안창호가 애국가를 보급하는 데에 앞장섰다는 데에 중점을 두고 있다. 1908년에 출판된 가사집 《찬미가》에 수록된 것을 비롯한 많은 일제 시대의 애국가 출판물은 윤치호를 작사자로 돌리고 있는 등 윤치호 설에는 증거가 많은 반면[1] 안창호 설에는 실증적인 자료가 부족하다.
1955년 국사편찬위원회가 윤치호 단독작사설을 심의했을 때 찬성 11표, 반대 2표로 만장일치를 끌어내지 못하여 결정을 유보하였고, 그 이후 애국가에 작사자에 대한 결정은 없었다. 따라서 2008년 현재 애국가의 공식적인 작사자는 미상이다.
작곡
처음 애국가는 가사에 스코틀랜드 민요인 〈작별(Auld Lang Syne)〉의 가락을 붙여서 불렀다. 새 곡을 써야 할 필요를 느낀 안익태가 1935년 11월 새 가락을 작곡했다. 새 가락을 붙인 애국가의 악보는 미국에서 출판된 것이 퍼져 1940년경에 상하이에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전해졌지만 한반도에는 일제의 검열로 전해지지 못했다. 1942년 8월 29일에 개국한 미국의 소리 한국어 방송은 애국가 1절 을 매일 방송하였다.
해방 이후 한반도로 새 애국가의 악보가 전해졌다. 애국가의 악보는 교과서 등을 통해서 한반도 전역으로 퍼졌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세워지면서 국가로 쓰게 되었다. 그당시 국민 마음속에 자리잡은 애국가의 위치를 고려하여 성문법으로 따로 규정하고 있지 않고, 이것이 지금까지 내려져오고 있다.
한반도 북쪽에서도 이 애국가를 부르다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세워지면서 같은 제목의 다른 곡을 새로 써서 지금까지 그것을 국가로 쓰고 있다.
비판
1964년 제3회 서울 국제음악제에 초대된 지휘자 피터 니콜로프는 기자회견을 열어 자신이 서울에서 받은 대우가 좋지 않다고 불평하고 음악제를 추진한 안익태를 상대로 비난 성명을 발표하면서 애국가의 가락이 도브리치 시의 시가인 〈오 도브루잔스키 크라이(О, Добруджански край ‘오 도브루자 땅이여’)〉와 많이 닮았다고 주장했다.[2] 그는 기자회견 자리에서 그 노래를 부르면서 이렇게 말했다. “만약 불가리아 사람들이 한국에 와서 〈오 도브루잔스키 크라이〉를 부른다면, 한국인들은 일어날 것입니다!(If Bulgarian singers came to Korea and sang O! Dobrujanski Krai, Korean audiences would stand up!)”
두 곡은 첫소절이 서로 비슷하지만 〈오 도브루잔스키 크라이〉가 약박으로 시작하는데 비해 〈애국가〉는 강박으로 시작하며, 전체적으로 가락의 분위기가 다르다. 안익태가 애국가를 작곡한 것은 1935년이고, 그가 처음으로 유럽에 간 것은 이듬해인 1936년이었기 때문에 그가 불가리아 민요를 접했을 가능성은 낮다.
1976년 이유선은 그의 책 《한국양악백년사》에서 위의 표절 문제를 거론하며 “대한민국은 완전한 민주독립국가이니만큼 하루 속히 국가를 [새로] 제정해야 할 것이다”고 썼다. 이에 안익태기념사업회 측은 반론자료와 함께 정부 각 부처에 진정서를 보냈다. 문화공보부와 국회사무처는 애국가가 30년동안 국가 역할을 한 점으로 볼 때 “명확한 근거 없이 표절 여부를 논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라고 발표했다.
애국가에 대한 또다른 비판으로는 그 선율 자체가 처음에 못갖춘마디처럼 들린다는 것이 있다. 이로 인해 뒷부분의 호흡에 문제가 생긴다는 지적이 있다.[3] 실제로 2006년에 YB가 편곡한 애국가에서는 첫마디만 못갖춘마디로 바뀌어 있다.
1977년 한국음악협회의 회장 조상현은 애국가의 표절 의혹과 함께 가사와 선율의 불일치, 소극적인 내용의 가사 등의 이유를 들어 1월 26일 총회에서 새 국가를 만들 것인지 여부를 결정한 다음 통과되면 이를 정부에 건의하기로 발표했다. 하지만 총회에서 새 국가에 대한 논의를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 이후에도 정부가 국가를 새로 제정하려고 한다는 의혹이 일기도 했지만 정부는 앞으로 국가를 새로 만들 계획이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2000년대 초에는 애국가의 저작권에 대한 논란이 있었는데, 애국가의 저작권이 스페인에 있는 안익태의 유족에게 상속되었으며 1992년부터 한국음악저작권협회 신탁을 통해 저작권료를 지불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불거진 것이다. 한국음악저작권협회는 상업적인 공연에 쓰인 애국가에 대해서만 저작권료를 받았는데, 이 가운데에는 입장료를 내고 보는 국가대표 축구 경기도 포함되지만 이것이 많은 이들의 상식 선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이다. 어떤 사람은 “학교에서 애국가를 불러도 저작권료를 내야 하는가”라고 비꼬기도 했지만, 그 경우엔 상업적인 공연이 아니므로 저작권료를 내지 않는다. 저작권에 대한 논란은 2005년 3월 16일 유족이 대한민국에 저작권을 무상 양도하면서 풀렸다.[1]
애국가의 작사자로 유력한 윤치호가 말년에 일본 제국의 관료로 일했다는 점도 비판의 대상이 된다. 윤치호는 105인 사건 때 수감을 당한 적이 있는 근대 개화 사상을 전파한 지식인으로서 일제 초기에는 독립 운동가였지만, 105인 사건 후 전향하면서 30여년을 일본의 식민 지배를 위해 앞장섰던 것이다.[4] 또한 작곡가인 안익태도 친일파라는 논란이 있다.
가사
한글 | 漢字混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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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 흔히 서울에 있는 남산으로 착각하고 있으나, 실제 뜻은 '앞산'임. 여기서 남(南)은 원래 앞 남 자.
바람서리 : 흔히 '바람소리'로 착각하고 있으나, 실제는 바람+서리 라는 뜻으로 풍상(風霜)의 한국어임
안익태(安益泰, 1906년 12월 5일 평양 ~ 1965년 9월 16일 바르셀로나)는 한국의 작곡가, 지휘자이다. 대한민국의 국가 애국가를 작곡했으며, 대표 작품으로 한국환상곡이 있다.
일생
안익태는 평양에서 태어났으며, 평양보통학교와 숭실중학교를 졸업했다. 1919년 친일 교사 추방 운동을 벌이다 무기 정학을 당하기도 했다. 1921년에 일본으로 유학, 세소쿠가쿠엔 고등학교에 음악특기자로 입학하였다. 1926년에는 도쿄 고등음악학교에 입학해 첼로를 전공했고, 1930년 졸업 후 다시 미국으로 유학했다. 신시내티 음악원과 필라델피아의 커티스 음악원, 템플 대학교 음악대학원에서 첼로와 지휘 등을 배웠고 한인 교회 등에서 음악감독으로 일하기도 했다.
1936년에 처음 유럽을 방문했고, 이 때 파울 힌데미트와 펠릭스 바인가르트너를 만나 음악 활동에 대한 의견을 교환했다고 전해진다. 1937년에 템플대학교 음악대학원을 졸업한 뒤 1938년에 아일랜드의 더블린 방송 교향악단을 객원지휘했다. 이후 헝가리에 머물면서 부다페스트 음악원에서 졸탄 코다이와 에르뇌 도흐나니 등에게 작곡을 배웠고, 종전 직전까지 독일과 이탈리아, 유고슬라비아, 불가리아, 루마니아, 프랑스, 에스파냐 등지에서 지휘 활동을 했다.
전황이 악화되자 1944년 4월에 파리에서 베토벤 축제 연주회를 마친 직후 에스파냐로 피난했으며, 그 해 12월에는 그의 대표작인 한국 환상곡의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자필 악보를 완성했다. 1946년에는 에스파냐 여성 롤리타 탈라베라와 결혼했고, 마요르카 교향악단의 상임지휘자가 되었다. 이후 스위스, 멕시코, 과테말라 등에서 지휘했고, 1955년 3월에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처음으로 고국을 방문했다.
1962-64년까지 3년간 서울에서 국제음악제를 주관했고, 런던 교향악단과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도쿄 교향악단 등을 객원지휘했다. 1965년 7월 4일에 런던의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마지막 연주회를 가진 직후 건강 상태가 악화되었고, 9월 16일에 에스파냐의 바르셀로나 병원에서 타계했다.
애국가와 표절 의혹
안익태의 작품 중 '애국가' 는 현재 대한민국의 정식 국가로 쓰이고 있지만, 그 작곡 연도와 장소에 대한 이견이 많다. 1964년 제 3회 서울 국제음악제 때 내한한 불가리아 지휘자 페터 니콜로프는 애국가가 불가리아 민요인 '오 도브루잔스키 크라이(O! Dobrujanski Krai)' 를 표절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는 당시 안익태의 활동에 대해 독재적이라고 비판하던 국내 음악계의 질시와 맞물려 큰 문제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최근에 음악학자 허영한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애국가는 안익태가 유럽을 방문하기 전인 1935년 11월에 미국의 필라델피아에서 작곡되었다고 하고 있어서 1936년에 베를린에서 작곡되었다는 설이 수정되기도 했다. 허영한의 연구가 표절이 아니라는 충분한 근거는 아니지만, 그 동안의 유럽 작곡설을 뒤집었기 때문에 표절이 아니라는 신빙성이 강화되었다는 주장이 많다.
애국가 외에도 '강천성악' 에 나오는 선율이 일본의 궁중 음악인 '에텐라쿠' 와 동일하다는 이유로 문제가 되기도 했고, 최근에 안익태의 유럽 체류 시절 연구에서 발견된 작품인 환상곡 '에텐라쿠' 가 원본이 아니냐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안익태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안익태는 1930년대 후반에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제자가 되었다고 밝혔으나,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1942년경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이 시기의 안익태 공연 프로그램에 '슈트라우스의 제자' 라는 내용이 실리기 시작했고, 슈트라우스가 자신의 작품인 '일본 축전 음악' 을 지휘한 것을 축하하는 의미로 작성해준 추천장이 남아 있다. 안익태는 2차대전 종전 후 슈트라우스의 교향시들을 본격적으로 다루었으며, 일본의 옹가쿠노토모샤(음악지우사)에서 슈트라우스의 전기를 출판하기도 했다.
1940년대 활동에 대한 의혹과 문제 제기
안익태의 1940년대 유럽 활동에 대한 정보는 대부분 김경래와 롤리타 탈라베라의 전기에 기록된 자료로 전해져 왔으나, 최근에 진행된 연구들에서 이들 자료의 오류와 왜곡 사례를 지적하고 있어 상당한 파문이 예상되고 있다. 유럽 체류 시절 안익태가 관변 단체였던 '일본-독일 협회' 와 긴밀한 관계에 있었으며, 일본의 가가쿠를 주제로 한 '에텐라쿠' 와 만주국 건국 기념 음악인 '만주국 축전곡' 등을 작곡했다는 기록도 발표되었다.
2000년에는 음악잡지 '객석' 의 베를린 통신원이었던 진화영이 안익태의 베를린 필 지휘 기록이 종전의 1940년이 아닌 1943년이며, 단 한 차례 뿐이었다는 기사를 발표했다. 같은 해 발굴되었다는 안익태의 지휘 모습이 담긴 기록 영화는 2006년에 독일 유학중인 음악학도 송병욱에 의해 만주국 축전 음악회의 실황 녹화였다는 사실이 밝혀져 국내 음악계에 충격을 주기도 했다.
2006년 11월 19일에 송병욱의 강연회를 통해 만주국 축전 음악회의 기록 영화가 한국에서 처음으로 공개 상영되었으며, 2007년에는 음악학자 이경분이 독일과 스위스 등지의 문서 보관소 등에서 찾아낸 자료들로 안익태의 1938-44년 활동상을 정리한 책이 출간되었다.
2008년 발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음악 부문에 선정되었다. 이에 대해 안익태기념재단 측은 "당시 본인 선택과 상관없이 국적을 잃은 안 선생은 일본인으로 활동할 수밖에 없었다"고 밝혔다.[1] 이 명단의 군 부문에는 형인 안익조도 포함되어 있다.
작품
- 성악 모음곡 '한국의 생활' (이팔청춘/아리랑 고개/전원/백합화. 1934~1935)
- 애국가(1936)
- 교향시 '강천성악'(관현악곡, 1936)
- 한국환상곡(합창과 관현악, 1936~1937)
- 환상곡 '에텐라쿠' (관현악곡, 1930년대?. 1944년 이후 악보 분실)
- 교향 환상곡 제 2번 '교쿠토(극동)' (관현악곡, 1930년대?. 1944년 이후 악보 분실)
- 전원곡 (Pastorale. 관현악곡, 1930년대?. 1944년 이후 악보 분실)
- 만주국 축전곡 (합창과 관현악, 1940년대. 1944년 이후 악보 분실)
- 논개(교향시, 1962)
- 애국지사 추도곡(관현악곡, 1962)
- 흰 백합화(성악과 기악, 1962?)
- 한국무곡(관현악곡, 1963)
- 교향시 '마요르카' (관현악곡, 1948. 2006년에 자필보 발견)
- 교향시 '포르멘토르의 로 피' (관현악곡, 1951. 2006년에 자필보 발견)
참고 문헌
- 김경래, 《안익태의 영광과 슬픔. 코리아 판타지》, 현암사, 1966.
- 롤리타 탈라베라, 《나의 남편 안익태》, 신구문화사, 1974.
- 전정임, 《안익태》, 시공사, 1998.
- 진화영, 《한국인 최초 베를린 필 지휘, 그리고 알려지지 않은 진실들》, 월간 객석, 2000.5월호
- 이규희, 《울어 버린 애국가》, 밝은미래, 2005.
- 송병욱, 《안익태의 알려지지 않은 두 작품》, 월간 객석, 2006.3월호
- 송병욱, 《안익태의 민족 정체성-어느 음악가의 정당한 평가를 위하여》, 월간 객석, 2006.4월호
- 박정미, 《안익태에 대한 의혹 제기와 그 오류에 대한 단상》, 월간 객석, 2007.1월호
- 이경분, 《잃어버린 시간 1938~1944》, 휴머니스트, 2007.
- 송병욱, 《안익태 '한국환상곡' 초연 70주년 특별기고 1-더블린 초연 현장을 말한다》, 월간 객석, 2008.2월호
- 송병욱, 《안익태 '한국환상곡' 초연 70주년 특별기고 2-헝가리 동영상과 안익태 이해의 새 키워드》, 월간 객석, 2008.3월호
주석
- ↑ 신재우. “`친일명단 발표' 후손ㆍ관련단체 반발 거세”, 《연합뉴스》, 2008년 4월 29일 작성. 2008년 5월 2일 확인.
바깥 고리
출처 = http://ko.wikipedia.org/'etc > 배우기 : 생활지식'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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