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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tc/배우기 : 생활지식

단원 김홍도(檀園 金弘道) - 조선 후기 화가

by 3sun 2008. 10. 4.

김홍도(金弘道, 1745년~ ?)는 조선시대 후기의 화가이다. 본관은 김해, 자는 사능(士能), 호는 단원(檀園)이다. 안산시 단원구는 이를 따온 이름이다. 정조 시대 때 문예부흥기의 대표적인 화가로 여겨진다. 산수화, 인물화, 풍속화 등과 주로 서민들의 일상생활을 그렸으며 서당, 씨름 등을 그린 사람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그림만 그린 것은 아니고, 시도 써서 아들 김양기가 출판한 《단원유묵》이라는 문집도 있다.

생애

1745년 한양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외가 안동 장씨 집안은 대대로 도화서 화원(나라에서 필요한 그림을 그리는 직업화가)을 배출한 미술가 집안이었기 때문에 김홍도는 외할아버지와 외삼촌에게 그림을 배웠다. 결혼한 뒤에는 복헌 김응환의 소개로 표암 강세황과 교제하였다. 표암은 인물, 화조(꽃과 새), 사군자 모두 능숙한 김홍도를 추천하여 도화서 화원이 되게 했는데, 덕분에 김홍도는 이인문 등의 여러 화가들과 사귀면서 그림공부에 몰두할 수 있었다.

1771년(영조 47년)에 왕세손 이산의 초상화를 그렸다. 1776년에 세손이 영조를 이어 정조로 보위에 오르자, 정조에게 규장각도를 바쳤고, 1781년(정조 5년)에 정조의 초상화를 그렸다. 정조는 김홍도와 그의 스승 김응환에게 1788년 금강산산수화를, 1789년에는 몰래 일본 지도를 그릴 것을 명하였다. 1789년 김응환이 부산에서 병으로 죽자 김홍도는 대마도로 가서 일본의 지도를 모사해서 가지고 돌아왔는데, 그림을 그린 방법이 비슷하다고 하여 일본에서 첩보활동을 하면서 화가로 활동했다는 설이 있다.

1790년에는 정조가 할아버지 영조와의 정치적인 대립으로 죽은 사도세자를 위해서 지은 사찰인 용주사 대웅전에 운연법으로 입체감을 살린 삼세여래후불탱화를 그렸다. 1795년에는 연풍현감으로 임명되어 근무하다 사임했는데, 충청도 연풍에서 현감으로 일한 경험은 김홍도가 민중들의 삶을 자신만의 개성-당시 조선 미술계는 중국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었다.-으로 그려내는 중요한 기회가 되었다. 1796년에는 용주사 부모은중경의 삽화, 1797년에는 정부에서 찍은 오륜행실도의 삽화를 그렸다. 이러한 활발한 작품활동을 할수 있었던 것은 소금장사로 부를 축적한 김현태(김경림)에게 그림을 그려주는 대신, 경제지원을 받았기 때문이다. 18세기 상업의 발달로 부유해진 중인계급들은 그들의 경제계에서의 위치성장에 걸맞는 예술적인 취향을 김홍도처럼 유능한 화가들과 교류함으로써 충족시키려고 하였다. 만년에는 김한태의 별세로 생활이 어려워졌지만, 무동(舞童,춤추는 아이), 서당, 나룻배, 씨름, 씨름등을 수록한 풍속화첩을 발표하여 민중들의 삶을 다룬 작품활동을 하였다.

1805년 질병으로 위독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언제 별세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의 아들 김양기도 아버지를 이어 화원이 되었다.

그림의 특징

  • 농담기법으로 강한 생명력을 표현했다.
  •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했다.
  • 배경은 은은한 먹으로 강조했다.
  • 조금 짙은 먹으로 그린뒤, 거기에다 나무와 바위등을 실감나게 표현하기 위해 가볍게 점을 찍었다.

작품


출처 = http://ko.wikipedia.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