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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절(光復節) - 일제 강점기(日帝强占期)

by 3sun 2008. 8. 15.

광복절(光復節)1945년 8월 15일,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일본연합군에 항복하여 한반도일제점령에서 해방된 날을 기념하는 날이다. 광복은 문자 그대로는 “빛을 되찾음”을 의미하고 국권을 되찾았다는 뜻으로 쓰인다.

같은 날 8월 15일 1948년에는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기념하는 날이기도 하다.

〈국경일에 대한 법률〉에 따라 국경일로 지정되었다.

최근, 일부 신우파에 의해서 광복절을 건국절로 변경하려는 시도가 있다.[출처 필요] 이미 1919년 대한민국은 건국되었고 동시에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가 1948년 정식정부를 수립한 것인데, 1948년을 대한민국 건국년으로 본다면 임시정부를 부정하는 꼴이 되어 이들의 주장은 딜레마에 빠져 있다.

대한민국 국기 - 태극기(太極旗) (그림을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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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日帝强占期, 1910년 8월 29일 ~ 1945년 8월 15일)는 한국의 근현대사를 시대별로 나누었을 때 주요 시대 중 하나로, 한반도일본식민지 지배 아래 놓였던 시기이다. 다른 명칭으로는 일제 시대(日帝時代), 일제암흑기(日帝暗黑期), 일본 통치 시대(日本統治時代), 일정 시대(日政時代), 일본 식민지 시대(日本植民地時代), 왜정 시대(倭政時代), 대 일본 전쟁기(對日本戰爭期), 대일항쟁기(對日抗爭期), 국권피탈기(國權被奪期) 등이 있다.

현재 일본에서는 한국병합(韓国併合), 일한합병(日韓合邦) 등으로 부르고 있다.

일반적으로 이 시기를 일본의 한반도 지배 정책에 따라 세 시기로 구분하는데, '헌병 경찰 통치기(무단 통치기)'(1910년~1919년), '민족분열기(문화 통치기)'(1919년~1931년), '민족 말살 통치기'(1931년~1945년)로 각각 지칭한다.

일반적으로 일본의 우파적 사학자들과, 식민지 근대화 혜택론을 주장하는 일부 한국 사학자들은 일제 강점기 전반기에는 일본이 한반도의 근대화를 도왔다고 주장하는 반면, 한국의 사학계에서는 조선 후기 자본주의 맹아론에 의거, 이러한 근대화 정책이 개항 이전 및 이후 자생적으로 성장했던 한반도 내의 민족 자본을 말살한 바탕 위에서 일본의 경제 개발이 이루어졌으며, 이는 일본의 영속적인 한반도 지배 의도를 실현시키기 위한 정책이었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왜냐하면 일본이 한국에서 철도 건설 등을 한 이유는 식민지를 근대화하려는 게 아닌, 식민지 수탈을 용이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배경

일제 통치의 시대별 전개

헌병 경찰 통치기 (무단 통치기, 1910년 ~ 1919년)

'헌병 경찰 통치기'라는 명칭은 1910년 9월에 창설된 헌병 경찰 제도에서 나왔다. 즉 헌병이 일반 경찰 행정까지 담당하면서, 언론·집회·출판·결사의 자유를 박탈하고, 즉결 처분권 등을 갖는 것을 말한다. 조선 총독은 일본군 현역 대장 중에서 임명되었고, 천황에 직속되어 입법권·사법권·행정권 및 군대 통솔권까지 장악하였다. 일본은 2만여 명의 헌병 경찰과 헌병 보조원을 한반도 전국에 배치하여 무단 식민 통치를 자행하였다. 이 당시 통치의 강압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조선태형령으로, 갑오개혁 때 폐지된 태형을 조선인에게만 적용하여 처벌한 것이다. 또한 이 시기에는 조선인의 각종 단체가 해산당하였다. 1911년 신민회를 해산시킨 105인 사건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일본은 1912년부터 시행된 토지조사사업을 진행하면서 기한부 신고제로 시행, 이를 잘 알지 못한 농민들의 토지를 침탈하였고, 소유권이 불분명한 마을이나 문중의 토지, 왕실의 토지 등도 동양척식주식회사에 넘겼다. 침탈된 토지는 일본 이민들에게 싼 값에 팔렸고 이 때에 고래의 소작권 개념이 무시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는 한반도에서 이뤄진 최초의 실질적 근대 토지 소유 개념을 도입한 정책이나, 광무개혁 시기에 이뤄진 양전사업이나 지계의 발급이 일본 측의 방해로 실패했다는 것을 되돌아보건대 그 실질적 의도는 토지의 침탈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외에도 조선총독부의 허가에 의해서만 회사를 설립할 수 있다는 회사령이나, 산림령임야조사령, 어업령, 광업령 등으로 한반도의 경제적 지배권은 대부분 일본에 넘어갔다. 동양 척식 주식회사의 수익이 한반도에 진출한 일본 재벌이나 조선인 지주층의 회사에 투자되면서 한반도의 경제적 개발을 촉진시켰다고 볼 수는 있으나, 민족 자본의 성장은 철저히 금지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와중에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민족자결주의를 주창함에 따라 1919년 3월 1일 3·1 운동이 일어나면서 전국적으로 평화적인 만세 시위가 일어났다. 일본은 이를 적극적으로 탄압하여 결과적으로는 실패하였으나, 산발적인 독립 운동이 하나로 일치 단결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조선총독부의 통치 정책 방향 또한 급선회하게 되었다.

민족 분열 통치기(문화 통치기, 1919년 ~ 1931년)

3·1 운동에 의해 일본 정부나 총독부 측에서는 기존의 통치 방식을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고, 사이토 마코토 총독의 파견을 기점으로 기존의 강압적 통치에서 회유적 통치로 그 방향을 선회하게 된다. 그 결과 일부 단체 활동 및 언론 활동이 허가되었고 아주 기초적인 초등 교육과 기술 교육만이 확대되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이름만 바꾼 것에 불과한 것으로, 친일파 양성을 통해 조선민족의 분열을 시도하였으며, 이는 가혹한 식민 통치를 철저히 은폐하기 위한 간악하고 교활한 통치 방식에 지나지 않았다.

일본군이 한반도에서 축출될 때까지 단 한 명의 문관 총독도 임명되지 않았고, 헌병 경찰제를 보통 경찰제로 바꾸었지만 경찰력은 더욱 강화되었고, 독립운동가 색출을 위한 전문적인 '고등 경찰제'를 도입하였다. 오히려 일본은 문화 통치를 통하여 자신들을 조선사람으로 생각하지 않는 소수의 친일관료들을 키워 조선인을 이간하여 분열시키고, 민족의 근대 의식 성장을 오도하며, 초급 학문과 기술 교육만을 이용하여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도움이 될 인간을 대량 양성하는 결과를 낳았다. 결국, 민족주의 세력 내에서 비타협적 민족주의와 민족 개량주의로 분화하여, 민족성 개조론이 등장하였고, 이는 자치 운동(참정권 운동)으로 발전해나갔다.

한편으로 이 당시에는 일본의 식량부족문제를 해결하려는 산미증식계획이 수립되어 한반도의 미곡 생산량을 증대시키는 시도가 이루어졌으나, 오히려 일본으로 유출되는 양이 더 높아져 한반도의 식량 부족이 심각해졌다.

민족 말살 통치기 (1931년 ~ 1945년)

1930년대에 만주사변이 발발하면서 일본은 중국 침략을 본격화하면서 한반도를 일본의 중국 대륙 진출의 병참 기지로 삼고, 이에 따라 일본의 경제적 지배 정책도 병참 기지화 정책으로 선회한다. 이어 1940년대에는 태평양 전쟁을 도발하면서 식민지 수탈을 더욱 강화하였다. 한편으로는 한민족의 문화와 전통을 완전히 말살하려는 정책을 취하고, 인적·물적 자원 수탈에 광분하였다.

조선인들을 완벽한 일본인으로 만들기 위한 민족 말살 통치가 진행되어, 내선일체일선동조론에 의거한 황국 신민화 정책이 실시되었다. 이에 따라 일본은 황국신민의 서사의 암기와 신사 참배 및 일본어의 사용을 강요하였다. 학교한글 교육은 중단되었고, 한국의 역사를 배울 수 없게 되었으며, 창씨개명이 강압적으로 행해졌다. 민족성이 강한 전문학교는 폐교되거나 강제 개명당했다.

특히 일본은 강제 징용으로 노동력을 착취하였고, 징병 제도를 실시하여 수많은 젊은이들을 전장의 총알받이로 내모는 한편, 젊은 여성들을 정신대(挺身隊)라는 이름으로 강제 동원하여 군수 공장 등지에서 혹사시켰으며, 그 중 일부는 전선으로 끌고 가 위안부로 삼는 만행을 저질렀다.

전쟁이 차츰 일본에게 불리하게 돌아가자 일본은 한국인의 해외 단파방송 청취를 엄중히 단속 하였지만 경성방송국의 직원이 독립운동 차원에서 미국의 소리 한국어방송을 들은 것이 일본 경찰에 의해 들켜 수많은 방송인들이 옥고를 치른 단파 방송 밀청 사건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태평양 전쟁 패전과 함께 한반도가 해방되면서 일제 시대는 종결되어 한반도는 일본의 지배에서 벗어나 광복을 맞이하였다.

독립운동의 전개

이 시기 한민족의 독립운동은 시대에 따라 다르게 진행되었다.

  • 구국운동기
    • 계몽운동, 의병전쟁으로 전개
  • 1910년대 - 민족 전열 정비
    • 국내, 국외로 나뉘어 독립운동 기지 건설
    • 3.1운동 참여 - 거족적 국립운동
  • 1920년대 - 민족 총력 항쟁
    • 일제의 만주침략으로 중국과 연합하여 항일연합군으로 대항.
    • 우파와 좌파의 대립을 극복하기 위한 민족주의 대두
  • 1930년대 - 해외 독립군, 전열 재정비
  • 1938년 이후 - 독립전쟁기
    • 전반적인 독립전쟁 체계를 갖추었다.

일제 강점기의 한국인 학살사건

이밖에도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사건이 있으나 구체적 자료를 소멸 및 은폐시켰기 때문에 알 수 없다.

3.1운동

1919년 3월 1일 전국적으로 일제에 대항해 일어났던 만세운동.

  • 전민족적인 인도주의 혁명운동.
  • '기미독립선언서'를 통해 정의·인도를 실현하기 위해 세계와 사회를 개조하자고 주장.
  • 민족지성과 독립운동의 방향을 정립.
  • 2만 명에 가까운 남녀 체포.
  • 당시 이화학당 학생이었던 유관순이 혹독한 고문으로 옥중 사망.

일제의 독립운동 탄압

전반적인 영향

일제의 무단 식민통치는 한국의 정치.경제.문화 전반에 막대한 영향을 주었다.

  • 여성의 지위 하락 - 일본은 전통적으로 여성의 지위가 낮았고, 그 영향으로 한국 여성의 지위가 크게 하락하였다. 여자의 재산 상속권과 호주 상속권이 사라진 것이 이 시기이다. (조선 시대에는 자녀 균등 상속제가 철저히 지켜졌었다.)
  • 인간 가치의 급락
  • 민주주의의 후퇴
  • 자주개혁의지 말살
  • 민족 말살과 민족성 변질 - '내선일체(內鮮一體)'를 목표로 역사를 왜곡하였으며, 일본의 풍습과 문화를 이식하였다. 일본, 조선의 학자들을 앞세운 '일선동조론'이 여기에 이용되었다.
  • 경제수탈로 인한 민생 피폐 - 한국인들은 '죽음을 담보한 노동'에 시달렸고, 빈곤한 생활을 벗어나지 못했다.
출처 = http://ko.wikipedia.org/